창경궁-창덕궁-삼청동으로 차디찬 낙엽 냄새 스민 바람이 코를 스친다. 마지막 잎새들의 바스락 풍기는 향기가 춥고 외로운 음지의 방구석에서 나오라며 기자를 마구 유혹하고 있었다. 모처럼의 주말 오전 8시. 아침 바람이 쌀쌀하지만 겨울용 슈트를 입은 덕인지 온몸은 훈훈했다. 기자가 애마(愛馬)라고 부르는 자전거를 타고 우선 대학로 로타리에서 우측 도로로 진입해 성균관대학교 가는 길로 향했다. 직진하다 보면 '국립서울과학 전시관'이 보이는데 현재 '노벨사이언스체험전'이라 하여 에너지와 환경에 관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중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관람하면 좋은 교육이 되겠다 생각하며 살짝 사진기에 담고 지나쳤다. 그 다음, 창경궁 돌담을 지난다. 날씨가 추운데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연인과 함께 또는 아이들과 함께 돌담길을 거닐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나와 같이 운치를 즐기는 이들이구나’ 하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창경궁을 지나 우회전하여 창덕궁을 향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낙엽이 풍성하게 쌓여 밟고 지나갈 때마다 푹신한 침대 위를 자전거를 타고 날아가는 듯 행복했던 돌담길이 이제는 을씨년스러운 대로 또 다른 멋이 있다. 중간에 종묘와 창경궁으로 이어지는 교각이 있는데 교각과, 세로로 교각을 나누는 흰 백(白)의 플라타너스, 그리고 교각 밑으로 휘어져 들어가는 커브길의 구도가 참 아름다웠다. 저 커브를 돌면 어딘가 모를 동화 속 나라로 연결이 돼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 커브를 돌아 창덕궁을 향했다. 창덕궁 앞에는 많은 관광버스와 함께 일본인 관광객들이 서성이고 있었으며 그들은 필자의 슈트와 헬멧과 야광 베스트(vest)가 신기했는지 한 번씩 쳐다보곤 했다. 그래도 그들에게 건전하게 주말을 보내는 아름다운 한국인의 모습을 보여준 것 같아 기분이 뿌듯했다. 궁궐담을 따라 오른쪽 골목길을 타고 다음에는 삼청동으로 진입했다. 진입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기자를 반겨준 것은 '한국불교미술박물관'이었다. 현재 미얀마 불교 관련의 '미얀마의 삶 그리고 마음 展'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미술관 벽면에 걸려 있는 길게 늘어진 목, 사지의 석가모니상 현수막을 바라보니 우리나라 불상과 달리 여성스럽고 우아한 불상의 미를 느낄 수 있었고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고 편안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골목길을 누비며 기자는 연갈색의 나무냄새 배어나오는 우리네 소박한 한옥들과 공방, 깔끔한 흑색 대리석으로 모던하게 꾸민 갤러리들을 보며 건물 자체가 예술이며, 건물이 모인 골목 이 작은 마을 하나가 예술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삼청동은 평일의 지친 직장인의 마음을 달래주는 참 고마운 거리였다. 이번에는 '정독도서관' 언덕길을 따라 언덕을 하나 넘었다. 산악 MTB 부럽지 않은 경사였다. 언덕의 정점에서는 낙산과 광화문이 내려다보였다. 마치 작은 산에 올라와 정상을 밟은 듯한 느낌이라고 할까? 언덕을 넘어오는 마을버스와 언덕배기 집 창에 장식된 소품들을 보며 지브리 스튜디오의 '모리타 히로유키' 작의 '고양이의 보은(猫の恩返し)'이 생각이 나는 것은 왜일까? 저녁 해가 질 때까지 그곳에 서서 기다리면 만화 속 고양이 '바론'이 깨어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색과 평화,' 혼자만의 여행이 주는 선물을 받으며 천천히 언덕을 내려왔다.
한국 근대사 한눈에 볼 수 있는 '인문박물관' 인근의 '중앙고등학교'에도 한번 들어가 보았다. 학교 안에는 동아일보를 창간하고 6.25사변 당시 부통령을 지내신 고(古) 인촌 선생님의 동상이 있었다. 한번 표를 사면 1년간 무료관람을 할 수 있다는 친절한 안내원의 말에 교내의 한국근대사를 다룬 '인문박물관'에 들어갔다. 박물관 안에는 "다 함께 가르키자! 배우자!"라는 빛바랜 먼 옛날의 '브나로드' 운동의 표어도 보였는데 '저런 시절도 있었지...' 싶으면서 세월이 빠름을 느낄 수 있었다. 2층에서는 옛날 교과서들과 함께 필자가 초등학교 시절에 열독했던 '둘리', '안녕! 미스터 블랙', '공포의 외인구단' 같은 추억의 만화를 구경할 수 있어 감회가 새로웠다. 박물관을 나와 보니 어느덧 시간은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기자는 분위기 있는 한 찻집에 들렀다. 평일동안 직장에서 쌓인 노곤함이, 마구마구 늑장을 부릴 수 있는 '휴일의 특권'과 함께 모두 사라지는 듯하다. 스피노자가 '내일 지구의 종말이 와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말했다면 기자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테이블에 앉아 커피 한 잔을 하고 싶다'고 말하고 싶다. 숍의 사장님이 마침 자전거 매니아셔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었는데 아무래도 단골이 되어버릴 것만 같다. 숍 바로 앞의 갤러리를 구경하고, 오후의 따스한 햇살 속에서 골목길 사이의 한옥들과 고목들을 촬영하며, 지나가는 외국인에 신기해하며, 기자는 정상을 향해 다시 자전거를 달렸다.
사대문 안 골목마다 신화와 낭만의 공간이 담소를 마치고 아쉬운 마음으로 다시 나선 길. 언덕길을 내려와 정독도서관가 골목을 지나 경복궁에 다다랐다. 빛 바랜 것을 좋아하는 기자의 특성 때문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녹슨 유물들을 쳐다보았다. 관람을 마치고 나니 시간은 어느새 저녁 7시. 광화문 광장으로 나와 한참 보수공사 중인 광화문을 배경으로 사진 찍어달라고 자꾸 보채는 까탈스러운 애마(이날 저녁 뒷바퀴도 펑크가 났다)를 모델로 한 컷 찍어보았다. 광화문 광장을 직진으로 질주하며 이번에 새로 생기신 세종대왕과 언제나 꿋꿋이 칼을 차고 이 땅을 지키시는 이순신 장군을 뒤로 하고 오늘의 종착지로 삼은 '덕수궁'을 향하였다. 20여 분 정도 달려 덕수궁에 도착하였는데 이미 문이 닫혀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덕수궁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알고 보니 저녁 9시까지 개장을 한다고 한다. 후에 합류한 기자의 벗과 함께 덕수궁 돌담길을 쫄레쫄레 거닐며 남정네 둘이서 수다를 떨었지만 가을 분위기와 돌담에 은은히 비취는 조명에 취해서인지 외롭기는 커녕 얼큰한 기분으로 저녁을 함께 하고 전철을 이용해 귀가했다. 서울 사대문 안 골목 구석구석에는 어둠속의 주황빛 백열등 밑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을 신화와 낭만의 공간이 많다. 우리네 삶에 예술과 영감을 선사하는 자그마한 갤러리와 박물관들도 곳곳에 숨어 있으며, 그밖에도 안목을 가진 사람들에게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숨겨진 보물들이 있다. 발 가는 대로 바퀴 굴러가는 대로, 구경하다 지치면 운치 있는 장소에 멈춰서 잠시 빵 한 조각과 차 한잔 '호호~' 불며 여유부릴 수 있는 나들이를 결심해보면 어떨까. 마음껏 게으름쟁이가 될 수 있는 자신만의 비주류 일일 코스를 만들어보시길.
시민기자/박정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