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최고의 작가 필립 클로델의 감독 데뷔작'
[고인배의 두근두근 시네마]
한 여인이 불안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다. 얼굴엔 피로감이 역력하고 초조 해 하던 그녀의 표정이 새들의 지저귐 소리에 엷은 미소로 바뀌면서 음미하듯 눈을 감는다. 차에서 황급히 내린 다른 여인이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간다. 이윽고 공항 식당에 앉아 기다리던 여인과 늦게 공항에 도착한 여인이 어색하게 상봉한다.
이것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북동쪽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10세소녀의 피살사건을 다룬 소설 "회색 영혼"으로 르노도상과 권위 있는 문학상을 수상하여 프랑스 최고의 작가로 떠오른 필립 클로델의 감독 데뷔작인 '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했어요'(I've Loved You So Long, ll Y A Longtemps Que Je T'aime)"의 타이틀 신이다.
기다리던 여인과 공항에 마중을 나온 여인이 자매인 것이 밝혀지면서 시작되는 이 영화는 언니인 줄리엣(크리스틴 스콧 토마스)이 어디서 오는 길이며 왜 여동생 레아(엘자 질버스테인)와의 만남이 서먹서먹하고 경직이 되었는지 궁굼증을 유발하며 전개된다.
더욱이 여동생 레아의 남편 뤽(세르주 지나비시우스)이 왜 처형인 줄리엣을 못마땅하게 여기는지 줄리엣이 15년의 수형생활을 마치고 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수긍하게 된다.
무엇보다 줄리엣이 아들 피에르를 살해한 죄로 15년간 감옥에서 복역했었다는 충격적인 비밀이 드러나면서 과연 그녀가 아들을 살해했는지, 그렇다면 왜 살해했는지 이 영화의 미스테리는 정점에 이른다.
국내에 처음 소개된 필립 클로델의 소설 "회색영혼"처럼 미스테리 형식으로 전개되는 이 영화는 "나는 영화감독처럼 소설을 쓰고 소설가처럼 영화를 제작한다."라는 그의 말처럼 슬픈 비밀을 간직한 줄리엣과 동생 레아가 서서히 마음을 열고 비밀을 털어놓기까지의 과정을 소설 한 장, 한 장 넘기듯이 담담하게 보여준다.
남자가 주인공인 그의 소설들과는 달리 11년 동안 감옥에서 강사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여성을 주인공으로 각본을 쓴 "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했어요"는 그런 만큼 숨겨진 비밀에 직면한 가족의 삶을 굵직한 복선 없이 잔잔한 파문으로 감동을 일으킨다.
15년을 감옥에서 지낸 줄리엣은 매주 경찰서에 출두하여 보호관찰관 포레 경위와 레아의 동료 미셸, 레아의 딸 릴리와 친해지면서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하고 병원 비서직 일을 하면서 사회에 적응 해 간다. 그러나 죽을 때 까지 그녀를 용서하지 않고 그녀를 가족에서 제외한 아버지의 죽음과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의 짧은 해후는 오히려 줄리엣에게 큰 고통과 회한을 남긴다.
소설을 읽는 듯한 감성을 부각시켜주는 이 영화의 포인트는 연기자들의 자연스런 연기와 섬세하면서도 정적인 영상이 주는 여백에 있다.
극단적인 요소를 배제한 절제된 영상이 자칫 심심하게 여길 수 있지만 오히려 사색과 정감을 동시에 이끌어 내어 곱씹게 하는 것이 이 영화의 장점이다.
특히 "잉글리쉬 페이션트"와 "호스 위스퍼러" 이후 뚜렷한 작품을 만나지 못했던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는 최상의 배역인 줄리엣의 차갑고 황량한 내면과 수척하면서도 가냘픈 그녀의 외면을 부각시켜 2008년 유러피안 필름 어워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연신 손톱을 물어뜯고 담배를 피우며 슬픈 침묵으로 일관하는 그녀는 처연한 눈빛과 우수로 가득찬 표정, 단아하면서도 쓸쓸한 몸짓만으로도 빛을 발한다.
또한 언니의 영향으로 자신의 아이를 낳지 않고 베트남에서 입양한 두 딸과 뇌손상으로 말을 못하는 시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대학교수 여동생 레아 역의 엘자 질버스테인은 언니와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레아의 갈등과 헌신을 자연스럽게 표출하여 세자르영화제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10년 동안 감옥에서 강의를 한 경험이 있는 미셸은 줄리엣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신뢰를 주는 필립 클로델 감독의 페르소나인데 미셸 역의 로랑 그레빌은 중후한 연기로 두 자매가 중심에 놓인 이 영화의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이 영화의 제목인 "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했어요"는 어린 시절 두 자매의 애창곡으로 서서히 마음을 여는 줄리엣과 레아가 함께 노래하는 장면을 통해 제목과 동일한 이 영화의 결말을 시사 해 준다.
탄탄한 구성과 연기진들의 진솔한 연기로 편견 없이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중요한 것인지 각인시켜주는 이 영화는 줄리엣의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그녀의 아픔이 절실히 배어있는 마지막 대사가 긴 울림을 준다.
"가장 지독한 감옥은 자식의 죽음이야.
그 감옥엔 석방이란 없어."
< 영화평론가, paulgo@paran.cpm >
[사진='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했어요' 포스터(위)와 스틸컷]기사 제보 및 보도자료 press@mydail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