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의 관(Evil Spirit; VIY)' 봄날의 꿈같은 아름다운 판타지 호러.
[고인배의 두근두근 시네마]
경성공포극 '기담'의 원작 시나리오로 스토리 구성에 있어 재능을 인정받은 박진성 감독의 장편데뷔작인 '마녀의 관'은 2008년 제13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이후, 1년 6개월 만에 뒤늦게 개봉된 판타지 호러이다.
박진성 감독은 러시아 대문호 니꼴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1809-1852)의 두 번째 소설집 '미르고로드'에 실린 단편 '비이(VIY)'를 기존 공포영화의 관습적인 장치와 고루한 반전을 지양하고 독특한 구성을 보여줬던 '기담'처럼 새로운 스타일로 각색하여 신선한 시도를 보여준다.
물론 이러한 시도는 우리에겐 이질적인 서양인의 마녀전설처럼 조금은 낯설지만 3막(3개의 챕터)이라는 옴니버스로 구성된 이 영화의 스타일은 소설 '비이'를 영화와 연극, 그리고 음악이라는 예술을 매개로 재해석하여 변형한 것으로 "우리의 삶을 충만하게 해 주었던 영화, 연극, 음악이라는 매체에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었다"는 박진성 감독의 예술가들에 대한 경의가 깃들어 있다.
러시아 국민작가 고골은 유럽 곳곳에 퍼져있던 마녀 전설을 거의 훼손하지 않고 단편 '비이'를 집필했다. 마녀와 괴물, 그리고 악령이 신성한 교회를 장악함으로써 신성모독과 믿음 사이의 격렬한 싸움이 벌어진다는 윤리적으로 모호한 설정의 '비이'는 1967년 기요르기 크로파치요프와 콘스탄틴 예르쇼프가 공동연출한 러시아영화가 제작되었고 '악령-비'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DVD로 출시되었다.
18세기 러시아의 한 시골 마을. 풋내기 수련 수사인 토마는 휴가를 얻어 고향에 가던 중 산 속에서 길을 잃어 방황하다가 외딴 집을 발견한다. 하지만 토마는 하룻밤 묵게 된 농가의 주인인 노파의 유혹을 받게 되고 그날 밤 토마는 그녀를 목에 태운 채 하늘을 날게 되고 그녀가 마녀임을 깨닫는다. 마녀를 두들겨패고 달아난 토마는 다음 날 지역 영주의 외동딸이 죽어가면서 임종미사를 집행해 줄 사람으로 자신을 지명했다는 전갈에 의아해 한다. 영주의 저택에 도착한 토마는 그 딸이 바로 어젯밤 자신이 만났던 마녀임을 깨닫는다. 그는 3일 동안 혼을 달래는 기도를 올리기 위해 죽은 여인과 밤을 보내야만 한다.
토마가 마녀와 함께 밤을 지새우는 장면에서 영혼과 육체, 성과 속 사이의 격렬한 투쟁을 보여주는 '악령-비'는 신앙심이 돈독하지 않고 속물적이면서 나약한 토마가 진정한 악의 공포에 맞닥뜨리면서 간절하게 신을 갈구하게 되지만 신에게 기대려던 토마의 패배를 통해 통제력을 상실한 영혼과 육체에 대한 두려움을 부각시켜준다.
"두려워하지 않으면 인간은 죽지 않습니다"라는 대사처럼 원작의 시대와 주제를 그대로 묘사한 '악령-비'와는 달리 3개의 챕터로 전개되는 '마녀의 관'은 영화와 연극 그리고 음악을 내세운 인형극으로 변주되어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에피소드로 마녀의 상징을 간접적으로 부각시킨다.
또한 3개의 독립적인 이야기는 결론적으로 연결되는 에피소드들이지만 마녀의 상징은 욕망의 공포와 매혹으로 차별화된다.
제 1막 이상한 여자는 '비이'를 영화로 만들려는 영화감독의 불안감과 강박증을 그린 작품이다.
"나는 그 여자가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라는 젊은 영화감독 P(정승길 분)의 나레이션과 마녀로 상징되는 신인여배우(임지영 분)의 오디션 장면으로 시작되는 이 에피소드는 영화감독 P가 오디션을 통해 뽑힌 신인여배우에 대한 불안한 심리를 통해 영화를 만드는 감독의 고뇌와 강박관념을 부각시켜준다.
여기에서 마녀는 감독의 강박증과 상통하며 현실과 상상, 선과 악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제 2막 마녀의 관은 고골의 '비이'를 그대로 연극무대로 옮겨 원작의 스토리를 자세하게 재연하면서 마녀의 실체를 각인시켜준다.
제 3막 커튼콜은 오브리 밴드 뮤지션인 시각장애인 앙리박(정승길 분)을 통해 음악에 대한 오마쥬를 보여준다. 젊은 연극인들을 소개받아 밴드 일이 끝난 후 극단 음악 감독으로 활동하는 앙리 박은 자신의 음악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사랑해주는 인형술사(임지영 분)와 연극단원들과 함께 인형극 '비이'의 음악 작업을 하면서 생애 최고의 행복한 날들을 보낸다. 그러나 매일 새벽에 들어오는 그의 뒤를 미행한 룸메이트는 극단 연습실을 엿보다가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비밀을 목격한다.
앙리박이 딴따라 귀신에 홀려있다는 무당의 말대로 환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앙리 박의 환각을 통해 진정한 예술의 도취를 보여주는 이 에피소드는 마지막 커튼콜에서의 박수갈채로 끝이 난다.
3개의 에피소드를 통해 완성되는 것은 제 3막 커튼콜이다. 비록 앙리 박의 환각이지만 진정한 예술작품을 완성한 예술가들에 대한 갈채의 염원과 연극에 대한 애정이 가득 담긴 마지막 커튼콜은 그런 만큼 아름다우면서도 슬프다.
3개의 에피소드 중 가장 영화적인 것은 제1막 이상한 여자로 빠른 템포의 편집과 내면적인 불안감을 독특한 분위기로 살려낸 촬영이 극의 긴장감을 배가시켜준다.
무엇보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제 2막 마녀의 관 에피소드이다. 원작소설 '비이'를 그대로 재현하는 연극 무대를 보여주는 이 에피소드는 입체 영화인 3D로 촬영되어 객석에서 연극무대를 실제로 보는 듯한 완전한 소격효과를 노린 감독의 아이디어는 좋지만 여건상 일반화면(2D)으로 개봉해 궁굼증을 남긴다. 그런 만큼 2D로 보는 제2막 마녀의 관은 평면화면만큼이나 설명적이어서 지루 해 진다.
진정한 3D인 연극무대를 카메라 워크와 이동 없이 관객석에 앉아 연극무대를 지켜보는 관객 시야로 카메라를 고정시키고 조명과 세트의 변화와 연기자의 움직임을 3D로 촬영하여 3D로 본다면 어땠을지 짐작만으로 감독의 의도를 접기엔 2D화면이 못 내 아쉽다.
강렬한 효과음으로 깜짝 놀라게 하거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일반적인 공포 영화와는 달리 인간 내면에 있는 근원적인 공포를 형상화한 이 영화는 제 1막 이상한 여자에서 "공포의 본질이 무엇인가요?"라고 묻는 프로듀서에게 느닷없이 감독이 달려들어 눈동자에 볼펜을 겨누면서 "이것이 공포의 본질입니다."라고 답하는 장면을 통해 이 영화의 성격과 방향을 제시한다.
재능 부족을 느끼는 영화감독, 신실하지 못한 신학생, 앞을 볼 수 없는 삼류 음악가는 스스로의 벽에 갇혀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 끝나지 않는 결핍된 욕망에 다가서는 인물들로 이들이 꾸는 꿈은 악몽인 동시에 꿈을 향한 비상으로 공감대를 형성한다.
영화감독, 신학생, 장님 음악가 역의 정승길과 여배우, 노파, 인형술사, 마녀 역의 임지영은 일인다역을 통해 안정적이면서도 차분한 연기력을 보여주고 박진석의 음악도 인상적이다.
영화적인 장점보다 연극적인 전개의 과잉으로 극적 재미와 긴장감이 부족한 것이 단점이지만 봄날의 꿈같은 아름다운 판타지 호러 '마녀의 관'은 꽃샘추위처럼 속살을 파고드는 전율과 서글픈 상념으로 긴 여운을 남긴다.
< 고인배 영화평론가 paulgo@par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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