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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나와라, 뚝딱! - 新 서울, 전설의 고향 ⑤ … 숙정문과 쌀바위

MOON성元 2010. 6. 16. 16:59

 

 

조선시대 한양도성에는 궁궐을 중심으로 방향과 성벽을 따라 남대문인 숭례문, 서대문인 돈의문, 그리고 동대문인 흥인지문과 함께 북문인 숙정문이 있었다. 그 중 평지에 있는 동대문이나 남대문, 서대문과 달리 북문인 숙정문은 궁궐 북쪽 산줄기에 걸쳐 있는 고갯마루에 서있어 주변 풍광이 아름다웠다. 처음에는 숙청문이라고 불렸는데 까닭은 알 수 없지만 숙정문으로 이름이 바뀌어 중종 이후의 실록에는 모두 숙정문으로 기록되고 있다. 숙정문은 4대문 사이사이에 있는 4소문 중의 하나인 창의문과 함께 경기 북부지역인 양주와 고양 지역으로 왕래하는 주요 통로로 이용되었다.

조선 초기의 기록을 보면 당시 유행하던 풍수설과 음양설에 따라 숙정문을 닫아 두었던 때가 많았다. 한 예로 태종 13년(1413) 6월에 최양선이라는 풍수가가 궁궐의 양팔 격인 창의문과 숙정문을 백성들이 통행하게 하는 것은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상소를 올리자 숙정문을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사람의 통행을 금지시켰다. 그 후 태종 16년에는 기우절목(祈雨節目)을 만들어 가뭄이 심하면 숙정문을 열고 남대문을 닫았으며, 비가 많이 내리면 숙정문을 닫고 남대문을 열게 하였다. 이것은 북쪽은 음(陰)이요, 남쪽은 양(陽)인 까닭에 날씨가 가물면 양을 억제하고 음을 부양하는 음양오행설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종 때에도 나라에 가뭄이 들면 종로의 시장을 구리개(을지로 입구)로 옮기고 남대문을 닫은 다음 북문, 즉 숙정문을 열어놓고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풍수설과 음양오행설로 문이 자주 닫힌 숙정문

한편 조선시대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숙정문을 열어 놓으면 서울 장안의 여자들이 음란해지므로 항상 문을 닫아 두었다고 전한다. 또 '동국세시기'에는 상원(음력 정월 대보름) 전에 민가의 부녀자들이 숙정문에 가서 세 번 놀다오면 그 해에는 재액을 막을 수 있다는 말이 전해온다고 하였다. 모두 조선시대에 유행하던 풍수설과 음양오행설에서 비롯된 풍습이었다.

그런데 이 숙정문 밖에는 인간의 탐욕을 경계하는 전설 하나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때는 어린 단종을 몰아내고 왕좌를 차지한 세조의 시절, 숙정문 밖 산골 마을에 효심이 깊은 젊은이가 살고 있었다. 논밭 한 뙈기 가진 것이 없는 집안 형편에 젊은 나무꾼은 장가도 들지 못하고 숙정문 밖에 있는 산에서 나무를 하여 성 안 저자거리에서 팔아 노부모를 부양하는 처지였다.

 

 

어느 봄날, 이날도 젊은이는 산에서 나무를 하여 지게에 짊어지고 숙정문으로 향했다. 아침도 변변히 먹지 못한 그는 땔감 무게에 짓눌려 온몸에서 진땀이 흘러내렸다. 그런데 오르막길을 허위허위 올라 숙정문에 이르자 문이 또 닫혀 있었다. 망연자실한 나무꾼은 터덜터덜 내려오다 길가에 있는 커다란 바위 옆에 잠시 몸을 쉬었다.

“싸르르르 싸르르르.” 너무 지쳐 깜박 잠이 들었었던 걸까? 꿈결처럼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슨 소리지?” 젊은이는 눈을 살며시 뜨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바로 자신이 기대어 잠이 들었던 바위에서 하얀 쌀이 조금씩 흘러내리는 것이 아닌가. 나무꾼은 재빨리 자신의 머리에 둘렀던 땀수건을 펴들고 흘러내리는 쌀을 받았다. 그렇게 흘러내린 쌀은 한 됫박쯤 흘러내리고야 멈췄다.

젊은이는 가슴 가득 기쁨이 차올랐다. 이만큼의 쌀이면 노부모님께 맛있는 쌀밥을 지어드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지게를 짊어지고 집으로 달려가 쌀밥을 지어 부모님 앞에 올렸다. 굶주렸던 부모님이 쌀밥을 맛있게 먹는 모습에 눈시울이 촉촉이 젖어오기까지 했다. 젊은이는 다시 저녁때가 되자 혹시 하는 마음에 바가지 한 개를 손에 들고 쌀이 흘러내린 바위로 올라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저녁밥을 지을 무렵이 되자 바위에서 다시 쌀이 흘러내리는 것이 아닌가. 이번에도 딱 한 됫박 분량이었다.

끼니 때마다 한 됫박씩만 흘러내리는 쌀, 혹시나 하던 나무꾼은 그만……

그렇게 나무꾼은 쌀바위에서 날마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흘러내리는 한 됫박씩의 쌀을 받아 부모님을 부양했다. 나무를 하던 일은 까맣게 잊고 살았다. 그렇게 석 달여의 세월이 흐르자 젊은이는 슬그머니 욕심이 생겼다. 끼니 때마다 한 됫박씩만 받아오는 게 너무 감질났기 때문이다.

“옳지.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젊은이는 다음날 아침 커다단 쌀자루 세 개를 들고 쌀바위를 찾아갔다. 세 개의 쌀자루에 쌀을 가득 채우면 세 식구가 반년 동안 넉넉하게 먹을 수 있다. 그러나 바위 밑에 쌀자루를 벌리고 앉아 기다렸지만 쌀은 여전히 아침, 점심, 저녁때에 맞춰 한 됫박씩밖에 흘러내리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을 기다려 커다란 자루 하나가 겨우 찼을 때 흘러내리던 쌀이 별안간 그쳐버렸다.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노부모님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은 생쌀이라도 먹으며 기다렸지만 늙은 부모님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나무꾼은 쌀자루를 둘러메고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굶주림으로 탈진한 부모님은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나무꾼은 털썩 주저앉아 통곡을 했지만 부모님은 다시 살아날 수 없었다. 효심 깊었던 젊은이의 욕심이 결국 부모님을 굶주려 죽게 만든 것이다. 이때부터 이 쌀바위에서 다시는 쌀이 흘러내리지 않았다. 성북구 성북동 숙정문과 쌀바위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다.

얼마 전 햇살이 따사롭던 날, 북악산 도성 성벽 길을 따라 전설이 깃든 숙정문을 찾았다. 종로구 삼청공원에서부터 시작하여 숙정문으로 향했다. 성벽으로 가는 길에는 ‘말바위 전망대 가는 길' 입구가 멋진 모습으로 맞아준다. 오랫동안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었다가 몇 년 전 개방된 북악산 성벽길을 따라 말바위 전망대를 지나 조금 올라가자 숙정문이 나타난다. 숙정문에서 내려다보이는 성북동과 골짜기 속의 삼청각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아름답게 복원된 성벽과 숙정문도 예스럽고 멋진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쌀이 흘러내렸다는 전설 속의 바위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근처에 있는 비슷한 느낌의 바위에서 '쌀바위 전설'의 흔적을 더듬어 볼 수밖에 없었다.

 
시민기자/이승철 
seung81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