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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그 포르노의 제작사는 동창 차명숙이 운영하는 곳이었고, 차명숙과 10년 만에 재회한 유주리는 엉뚱한 부탁을 들어달라고 조른다. 그녀는 죽은 심장을 되찾아 펄떡펄떡 뛰게 만들고 싶다.
유주리는 여러 남자를 바꿔 가며 관계해보길 원한다. 현실은 반대다. 그녀는 ‘자자고 하는 사람도 없고, 남자 살 돈도 없다.’라고 푸념한다. 욕망은 충족되지 않는데, 주변은 욕망을 자극하는 것들로 넘쳐난다. 대머리 교수의 다리 사이는 어쩜 그리 불룩해 보이고, 노 의사는 하필 빨간 팬츠를 입고 있으며, 근육질 청년은 왜 연구실 앞에서 몸을 단련한단 말인가.
비단 유주리뿐 아니라 <심장이 뛰네>의 모든 인물은 욕망을 배신하는 현실 때문에 괴롭다. 유명 감독 ‘제인 캠피언’의 이름을 본떠 회사명을 ‘캠피언 미디어’라 지었으나, 차명숙이 제작하는 영화는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포르노그라피다. 그녀를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건, 같이 영화를 공부했던 친구들의 신작 발표 소식이다. 지 감독은 궁핍한 현실 탓에 포르노 제작 현장을 벗어나지 못한다. 앞을 가로막고 선 거대한 벽은 제대로 된 작품을 연출하려는 꿈을 번번이 좌절시킨다.
포르노 배우 별은 얼굴과 목소리를 가린 채 출연한다. 그는 포르노 출연이 미래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신경 쓰지만, 영화는 그의 장밋빛 미래를 낙관하지 않는다. 교수를 희망한다는 그가 머리 대신 몸만 단련하는 이유는 뭘까.
마침내 유주리의 출연을 허락한 차명숙은 계약서를 내놓으며 “사인하는 순간부터 나는 네 친구가 아냐. 너는 내가 고용한 한 점의 살덩이야”라고 말한다. <심장이 뛰네>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순수한 관계를 의식적으로 제거한다. 주임교수가 유주리에게 매번 확인하는 사항은 승진 심사 및 교수 자격 유지 조건과 관련된 것들이다. 유주리가 학생들과 나누는 관계 또한 선생과 제자의 그것과 거리가 멀다. 차명숙은 은근히 옛 친구 관계를 회복하려 애쓰지만, 유주리는 이상할 정도로 상대방의 접근을 거부한다. 가족 관계조차 불투명한 유주리는 영화 내내 타자와 계약에 의거한 관계만 맺는데, 그 중 가장 문제적인 건 그녀와 별의 관계다.
유주리와 별은 계약에 의해 몸과 몸을 섞는다. 언어와 예술을 가르치던 유주리는 몸의 언어를 터득해야 하기에 힘겹고, 별은 상대 배우에게서 살덩이 이상을 발견해 놀라면서도 굳게 다문 입을 열지 않는다. 유주리가 그토록 원했던 육체적 관계는 계약적 관계로 변질된다. 두 사람은 감독이 몇 분 만에 끝낸 각본대로 연기해야 하고, 그들의 관계는 계약 너머로 발전하지 못한다. 가면이 그들의 얼굴을 가리고 있으며, 대사가 없으므로 목소리도 필요 없다. 상대방에게 자신을 노출하고 표현할 일말의 장치가 없기에, 유주리와 별은 공허한 인간관계의 한 표본처럼 보인다. 계약, 즉 공적인 약속은, 어쩔 수 없이 그것에 동의한 인간을 억압하고 병들게 한다. <심장이 뛰네>의 비극은 거기에서 출발한다.
이런 유의 영화가 종종 도달하곤 하는 어리석은 결론은, 육체적 욕망의 추구가 순수한 사랑의 행위에 비해 허무하고 차원이 낮다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심장이 뛰네>는 그런 한심한 말을 내뱉을 마음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유주리가 박차고 일어나 투사가 되도록 독려하지도 않는다. 알렉산더 클루게의 영화라면 또 모를까, <심장이 뛰네>는 주인공이 평범한 사람이라는 걸 잊지 않는다. 유주리가 얻은 깨달음이 있다면, 욕망은 인간을 해방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욕망은 현실의 결핍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죽음에 이르지 않는 한 인간은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욕망을 완벽하게 충족시키거나 욕망에서 벗어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는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유주리는 다른 시선으로 욕망을 바라보게 된다.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자유에 한 발짝 다가서는 것이다.
이전에 그녀는 과일가게를 지날 때마다 석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석류에 손을 대지 못했다. 이브에게 사과가 아닌 석류라니(비록 수박은 아닐지라도)! 마침내 그녀는 들끓는 욕망의 상징과 같은 석류를 집어 든다. 이어 그걸 길바닥에 내려놓은 뒤 집으로 향한다. 앞으로도 욕망은 그녀의 주변을 서성일 것이고, 욕망은 그녀를 지치게 만들 것이다. 어쨌든 그녀는 본능을 직시하고 바닥에 도달해본 인물이다. 한때나마 스스로를 구출했던 그녀는 그 에너지로 내일을 살 것이다. 그녀의 사직서는 그 에너지로 쓴 첫 페이지이며,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벅찬 희열을 안겨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