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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그 저 귓것

MOON성元 2011. 8. 26. 14:09

비가 촉촉하게 내리는 날, 초라한 행색의 남자가 제주에 도착한다. 눈에 띄는 게 있다면 기타를 맨 것 정도. 그는 시골의 옛집을 찾는다. 아무도 살지 않는 쓸쓸한 집은 그와 닮았다. 언제부턴가 시계는 멈췄고, 두꺼비집은 내려져 있다. 곰팡이 슨 방에 앉은 그의 표정은 어둡다. 날이 화창하게 갠 다음 날, 그는 어머니의 산소로 간다. 주변의 꽃은 만발했는데, 남자는 파헤쳐진 무덤 앞에서 통고하며 앉았다. 그
런데 어느 순간 음악이 멈추고, 영화는 예상하지 못한 장면으로 넘어간다. 슬픈 정조의 드라마가 아니었단 말인가. 이어 6분 50여 초가 지날 즈음 영화의 타이틀이 뜬다. ‘어.이.그. 저. 귓.것.’ 이건 또 무슨 뜻일까.
발음하기에도 생소한 ‘어이그, 저 귓것’은 제주도 방언으로 뜻은 대략 ‘어휴 저 바보 같은 녀석’이라고 한다. <어이그, 저 귓것>은 ‘귀신이 썩 데려가 버렸으면 싶은 어리석은 녀석들’이 벌이는 소극이자 신기한 뮤지컬이다. 제주는 일에 열심인 여자들의 땅이 맞나 보다. 여자아이들은 공부하러 집을 나서고, 나이 든 여자들은 생활고를 해결하고자 애쓰는데, 이 산간마을에서 일하는 남자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노는 데 이력이 난 네 남자가 있다. 서울 변두리에서 노래를 부르다 아픈 몸으로 낙향한 용필, 술로 허송세월하다 졸리면 길에서 자는 하르방, 가정을 돌보기보다 용필을 뒤따르는 게 더 신나는 뽕똘, 춤을 배워 도시로 가는 게 꿈인 댄서김. 노동과는 담을 쌓고 사는 그들이다.

좌표를 그리기가 힘든 영화다. 영화 용어를 들먹이며 풀어보려 해보지만 그게 힘들다. 감독 오멸은 미술과 연극을 업으로 삼다 영화로 월경한 인물이다. 그는 영화의 문법을 거부하고 있는 게 아니라 영화의 문법을 하나도 모른다는 투로 영화를 만든다. 영화를 너무 잘 알아서 영화를 잘 만드는 감독이 있는가 하면, 자기만의 손과 마음으로 영화를 창조해내는 감독이 있다. 오멸은 후자에 속한다. 그에겐 태생적으로 창조자의 피가 흐르는 것이다. 오멸은 자신이 잘 아는 것을 그냥 자연스럽게 카메라에 담았다고 말했다. 불필요한 부담으로부터 벗어나 예술의 허세를 부리지 않는 것, 오멸 영화의 비밀은 바로 거기에 있는 것 같다.

<어이그, 저 귓것>의 미덕 중 하나는 한가로움이다. 한가로운 정서는 인물과 이야기와 배경이 서로 앞서겠다고 다투지 않는 데서 기인한다. 강한 인물과 유별난 이야기와 휘황찬란한 미술이 서로 잘났다고 우격다짐하는 요즘 영화와는 판이하게 다른 상황이 벌어진다. 돌과 나무와 집들이 한적한 마을 ‘용수암’을 이루듯, 각각의 인물은 자연의 한 구성체 이상을 넘보지 않는다. 이야기는 또 어떠한가. 달짝지근한 이야기로 누군가를 현혹할 마음은 애초에 없다. 극 중 반복되는 경쾌한 음악처럼, 그들의 노는 모양새가 삶의 원 안에서 돌고 도며 이야기를 만들 따름이다. 자연은 그 자체로 시다. 그것에 맞춰 걸음을 걸으면 그것으로 시는 더욱 풍성해진다는 사실을, <어이그, 저 귓것>은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세 한량이 잔칫집을 방문한 장면은 탁월한 리듬으로 영화의 시를 쓴 경우다.

술을 마시고 싶은데 돈이 없어 울적해진 그들은 아랫마을의 잔치에 놀러 가기로 한다. 부조금도 없는 그들이 어디 환영 받는 손님이겠느냐만, 옷까지 빼 입은 그들은 아주 신이 났다. 삶에서 그런 것처럼 그들은 주변 자리에서 조용히 술을 마시며 논다. 그런데 천진난만하게 웃음 짓는 그들 머리 위로 먼 천둥소리가 들린다. 그들은 각자 돌아온다. 먼저 집에 도착한 용필은 기타를 치며 비를 노래하고, 뽕똘은 취한 걸음으로 비틀거리며 집에 돌아오고, 하르방은 비 오는 것도 잊은 채 나무 아래 누워 잠에 들었다. 지그시 눌러둔 클라이맥스로 이어지는 이 장면은 <어이그, 저 귓것>의 정서를 대변한다. 같이 웃던 웃음 사이로 자그만 슬픔을 껴안고 길을 떠나는 게다. 제각기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삶의 무게를 지탱하는 방식. <어이그, 저 귓것>은 그것을 서두르지 않는 리듬으로 노래한다. 이 장면은 잊고 있던 중요한 기억을 되살린다. 영화는 어쩌면 삶의 희로애락을 노래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혹자는 ‘왜 이렇게 무의미한 인물들을 보아야 하는지’ 질문할 수도 있겠다. 글쎄, 현실적인 가치만으로 삶의 의미를 따지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어이그, 저 귀것>을 보면서 뤽 물레와 알랭 기로디의 영화를 떠올리게 되는 건, 오멸 영화의 인물들이 자연을 배경으로 한량처럼 살기 때문이 아니다. 물레와 기로디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조금씩 정상성에서 벗어나 있다. <어이그, 저 귓것>의 용필과 하르방과 뽕똘과 댄서김도 그에 못지않다. 네 남자는 살짝 미친 자들이다. 미친 자의 웃음보다 전복적인 건 드물다. 그들의 웃음 앞에서 우리는 정상이라 불리는 삶이 실제로 얼마나 갑갑하고 고루한 것인지 알게 된다.
이용철(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