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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도키, 뉴욕

MOON성元 2010. 1. 8. 11:36

 

 

이번에는 스파이크 존즈도, 미셸 공드리도 없다. <시네도키, 뉴욕>은 찰리 카우프먼이 절친한 영화감독들의 도움 없이 홀로 각본과 연출을 겸한 감독 데뷔작이다. 때문에,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이 영화에는 카우프먼의 색깔이 선명하게 반영되어 있다. 시간과 이야기를 비틀고, 꿈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며, 지적인 퍼즐을 풀다가 감성적인 펀치로 마무리하는 솜씨는 여전하다. 무엇보다 <시네도키, 뉴욕>의 주인공 케이든 코타드(필립 세이무어 호프먼)는 예민한 예술가 카우프먼의 자아가 반영된 캐릭터다. 아예 ‘찰리 카우프먼’이란 이름의 시나리오 작가를 주인공으로 한 <어댑테이션>의 선례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상상력이 한층 대담해졌고, 지적인 유희와 철학적 인용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직설화법을 피해가는 카우프먼의 스타일은, 제목 ‘시네도키’에서부터 확연히 드러난다. 시네도키(synecdoche)는 일부로 전체를, 혹은 전체로 일부를 나타내는 수사법의 일종인 제유법을 의미한다. 연극 연출가인 주인공 케이든이 삶을 예술로 표현하려는 시도 역시 제유법의 맥락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영화 속 배경이 되는 뉴욕주의 한 도시 ‘스케넥터디’(Schenectady)가 말장난처럼 얽혀 기이한 제목이 탄생했다.

영화는 청명한 아침을 맞은 스케넥터디의 한 가정을 비추며 시작한다. 이곳에서 케이든은 화가인 아내 아델(캐서린 키너), 5살짜리 딸 올리브와 함께 살아간다. 그러나 이 가정은 이미 금이 가 있다. 케이든은 부고기사에 집착하며 인생의 무상함에 괴로워하고, 아델은 남편이 죽어가는 상상을 한다. 신경쇠약 직전의 이 커플은 아델이 딸과 함께 베를린으로 떠나면서 완전히 헤어지게 된다. 아델이 떠난 이후에도 케이든은 극장 매표소 직원 헤이즐(사만다 모튼), 여배우 클레어(미셸 윌리엄스)와 관계를 이어가지만, 그는 현재에 충실하지 못한 남자다. 떠난 여인들에게만 집착하는 케이든에게 완전한 관계란 없다. 그리고 이런 내면의 부작용은 염증, 발작 등의 신체적인 증상을 동반한다.
 
 
여기까지가 비교적 명확한 현실인 반면, 이후부터는 꿈과 현실, 예술과 실제 삶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시간의 흐름이 급속도로 빨라지면서 카우프먼의 시간 비틀기 솜씨도 가속도를 내는 것이다. 그 기점이 되는 것은 케이든이 위험하고 대담하기 짝이 없는 프로젝트, 즉 자신의 삶 전체를 연극으로 옮기는 시도를 하면서부터다. 케이든은 뉴욕의 거대 창고 안에 실물 크기의 도시를 짓고, 자신과 주변 인물들을 연기할 배우들을 떼거리로 동원해 기약 없는 리허설에 나선다. 틈틈이 케이든의 현실을 암시하는 장면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카우프먼이 그리는 꿈은 현실처럼 명확하고, 현실은 꿈처럼 몽환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호한 막들이 하나둘씩 걷히고 나면, 그 끝자락에서 외롭고 지친 예술가의 초상을 만나게 된다.
 
 
케이든은 예술에서 현실의 대안을 찾으려 하다가, 결국 자신이 창조한 세계 안에 갇혀 살아간다. 이런 모티브는 미셸 공드리가 연출한 비욕의 뮤직비디오 ‘Bachelorette’와 흡사하다. 더 노골적으로는 ‘예술은 삶을 모방하고 삶은 예술을 모방한다’는 보드리야르의 철학을 떠올리게 한다. 심지어 케이든이 자신을 연기하는 배우를 보면서 자아의 원형을 찾아가는 대목은 융의 심리학과 맞닿아 있다. 그 외에도 카프카와 도스토예프스키 등 <시네도키, 뉴욕>은 지성의 나열과 과도한 상징들로 흘러넘친다.
 
 
이 지적이고 다소 오만하기까지 한 실험들은, 인간 내면을 분석하기 위한 카우프먼 특유의 탐색과정이다. 그런 점에서 <시네도키, 뉴욕>의 진정한 하이라이트는 지적인 여행 그 자체가 아니라, 요란한 실험이 다 끝난 후 진한 휴머니티와 마주했을 때다. 카우프먼의 전작 <이터널 선샤인>이 과학의 힘으로도 지울 수 없었던 사랑을 그렸듯 말이다. 결국 <시네도키, 뉴욕>은 예술가의 야망에 관한 이야기이기 전에, 한 인간의 외로운 뒷모습을 비춘 영화다. 그 이성과 감성의 조율을, 카우프먼은 훌륭하게 해냈다. 여전히 스파이크 존즈나 미셸 공드리가 연출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지우기 힘들지만, 카우프먼의 이 담대한 데뷔작은 꼼꼼하게 논의될 가치가 충분하다.
 
신민경(영화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