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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즈비언 시네마의 거장 - 바바라 해머 회고전
MOON성元
2010. 1. 8.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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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했지만 보이지 않았고, 불리어질 수 없는 이름을 가진 '여자'라는 존재가 자신들의 글쓰기 방식, 말하기 방식을 탐구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역사의 타자(others)이자 말하는 부재(absence)인 '여자'는 여성적 표현을 위해 기존의 플롯을 해체하는 방식을 택하였기 때문에 주류적 플롯 구성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생소하고 낯설고 난해하다. 그런 점에서 이성애 중심적이고 남성적인 서사 구조의 해체와 재구성의 작업을 해온 바바라 해머의 작품들은 전통적 영화 형식에 익숙한 이들에게 다소 난해하게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40여년간 페미니스트 비디오 액티비스트로서 바바라 해머는 레즈비언이라는 자신의 성 정체성에 입각해, 누구보다도 진지하고 힘있게, 다양한 방식으로 끈질기게 레즈비언 섹슈얼리티를 탐구해왔다. ‘레즈비언시네마의 거장’이라는 명칭이 협소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그녀의 관심 영역은 성적 소수자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시작은 언제나 레즈비언, 개인의 이야기이지만, 그 개인의 역사가 얼마나 많은 사회적 권력들로 구성된 것인지를 그녀의 영화는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바바라 해머의 작품은 다큐멘터리와 실험영화 등을 넘나들며, 내용적으로 '여성 성소수자'의 문제를 담는 것을 넘어서 기존의 플롯 구성이 여성의 이야기를 담아낼 수 없다고 보고, 완전히 새로운 '말하기 방식'을 구축하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갖는다. 한국에서 작업한 <제주도 해녀>(2007)를 들고 2008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를 찾기도 했던 바바라 해머의 작품은 국내에서도 몇몇 영화제를 통해 소개된 적은 있지만 이번 바바라 해머 회고전과 같은 형식은 처음이다. 대안영상문화발전소 아이공의 주최로 아이공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게 되는 이번 바바라 해머 회고전에서는 1970년대 초기 작품부터 최근 난소암과의 사투를 벌인 후 개인적 경험과 고찰을 담은 2008년 작 <말이 아닌 은유A Horse Is Not A Metapho>까지, 바바라 해머의 장편 7편과 중단편 14편의 작품이 상영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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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월경, 오르가즘, 레즈비언 섹슈얼리티 등 사회적으로 금기시되어 침묵하며 묻혀있었던 이야기들을 거침없이 파내어 영상언어로 담은 그녀의 초기작인 <레즈비언 에로티카>는 1970년대 해머의 작품, <내가 사랑하는 여인들: Women I Love>, <멀티플 오르가즘: Multiple Orgazim>, <레즈비언 사랑의 기술: Dyketactics>, <이중 강도: Double Strength >등 레즈비언 섹슈얼리티에 대한 네 편의 클래식 영화로 묶인 섹션이다. 해머 자신의 자서전적 이야기로 출발하는 초기작들은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라는 페미니즘의 유명한 전언을 확인시켜줄 것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 바바라 해머는 비디오 액티비즘에 매료된다. <나쁜 두 딸들 Two Bad Daughters 1988>, <잠잘 때의 동화 Bedtime Stories I, II, III 1988> 등에서 해머는 비선형적이고 은유적이며 파편화된 방식으로 작업함으로써, 관중들이 영화를 보면서 그 자신의 이야기를 구성해갈 수 있도록, 실험성을 더했다. 물론, 숨겨져 있던 것들을 드러내고 보여주고, 표현한다는 그녀의 목표는 굳건하고도 일관되다. 중단편 섹션에서 상영되는 <노 노 누키 TV No No Nooki TV 1987>, <텔레비전파이 TV Tart 1989>, <뻥튀기: 에이즈에 대한 언론 히스테리아 Snow Job: The Media Hysteria of AIDS 1986>는 영양가 없고 백해무익한 설당 덩어리 디저트 같은 텔레비전이 눈덩이처럼 양산해내는 호모포비아, 성적 차별, 성 소수자에 대한 억압 등에 대한 반기이자, 주류 미디어의 재현 작용에 대한 해체 작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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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다큐멘터리는 액티비스트로서의 그녀의 면모가 잘 드러나는 영역이다. 그녀의 다큐멘터리는 지금까지 남성 중심의 대서사였던 기존 역사로부터 숨겨져 온 주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말한다. 영화 속 다양한 장치들은, 관객이 영화를 보는 동안 사회의 변화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인지적으로 깨닫도록 만든다. 16분짜리 단편 <레즈비언 세계사 The History of the World According to a Lesbian 1988>에서 이미 성적 소수자를 중심에 둔 역사 쓰기를 실험한 해머는 1990년대 들어, 거시적, 미시적 차원의 역사 새로 쓰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역사 수업 History Lessons 2000>은 주류 미디어 비판과 맞닿아 있는 작품으로 선정적인 주류 언론들이 그동안 동성애를 어떻게 표현해왔는지를 탐구하는 작품으로, 초창기 흑백사진부터 최근 언론의 조잡한 문구들까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여성의 옷장 | The Female Closet 1998>은 20세기 레즈비언 역사를 다룬다. 사진작가 앨리스 오스틴, 다다이스트 한나 호크, 그리고 뉴욕의 현대예술가 니콜 아이젠멘의 사진. 영상. 인터뷰로 이루어져 있는 이 작품은 그 예술가들의 생애에 '옷장'이 어떠한 역할을 했는가에 대해 심문하며 서구문화에서 시시하게 지나쳐버린 레즈비언의 공헌에 관한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으려 노력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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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영역에서 시작하여 거시적인 사회 권력의 문제를 들춰내는 것은 성적 소수자의 문제에 접근하는 해머의 방법론이다. 장편 다큐멘터리 <질산염 키스 Nitrate Kiss 1992> 는 레즈비언으로 추정되지만 그에 대한 어떠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은 미국 소설가 윌리아 카터(Willia Cather)의 일생을 쫒아 올라가면서 ‘퀴어’의 역사를 고의적으로 은폐한 권력이 무엇인지 반증한다. <바비의 일생 Tender Fiction Still Point 1995>은 해머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로 바비 인형처럼 자신을 키우고 싶어했던 어머니의 욕망과 자신이 레즈비언으로서의 정체성을 인지하게 되는 과정 등을 허구와 사실을 넘나들며 다루고 있다. 그 외에도 해머의 다큐멘터리는 레즈비언, 성적 소수자, 여성 등으로 그 관심의 폭을 확장하면서 마치 인류학자처럼 세계 여러 곳의 성적 소수자와 여성의 삶을 다큐멘터리 속에 담는다. <아웃 인 남아프리카 Out in South Africa 1994>는 인종적 차별이 존재하는 남아공의 게이,레즈비언의 삶과 욕망을 말한다. 인종적, 성적 차별 속에서 어떤 이는 인종적으로는 주류에 속해 있지만 성적으로는 비주류에 속한다. 인종적, 성적으로 다층적인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보여주면서 통합적이면서 갈등하지 않는 정체성이란 가능한지를 되묻는다. <저항하는 파라다이스 Resisting Paradise 1999>와 <제주도 해녀 Diving Women of Jeju-do 2007>에 이르면 그녀의 관심사는 여성으로 확장된다. 프랑스 카시스 섬에 남겨진 제2차 세계대전 생존자에 관한 다큐멘터리인 <저항하는 파라다이스>에서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나치 점령하의 프로방스에서 레지스탕스에 가담했던 화가 마티스의 부인과 딸, 나치 수용소로 이송되는 정치가를 몰래 도왔던 유태인 등 숨겨진 여성의 역사가 밝혀진다. 2000년 한국을 방문한 바바가 제주도에서 해녀들을 조우한 후 강렬하게 이끌려 만들게 된 <제주도 해녀>는 25분 분량의 짧은 다큐멘터리이지만 생계를 위해 거친 바다에서 싸우는 해녀의 모습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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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회고전은 서울아트시네마와 미디어극장 아이공 두 곳에서 순차적으로 열리게 된다. 2010년 1월 5일부터 1월 12일까지는 서울아트시네마에서, 1월 13일부터 1월 30일까지는 미디어극장 아이공에서 상영된다. 미디어극장 아이공에서는 장편과 중단편을 합쳐 20편이 상영되며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이 중 장편 7편이 선정 상영되게 된다. 이번 회고전에서는 몇몇 부대행사도 마련되어 있다. 미디어극장 아이공의 로비에서는 <바바라해머 일대기로 본 레즈비언 성혁명의 역사>라는 전시가 이어질 예정이다. 또, 서울아트시네마와 미디어극장 아이공에서 네차례의 강연회도 준비되어 있다. ‘레즈비언 역사의 발굴과 재전유, 그리고 바바라 해머’라는 이름으로 열리는 강연회에서는 해머의 역사 장편 다큐 3부작 읽기를 비롯하여,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로서 새로운 페미니즘의 패러다임을 제시한 주디스 버틀러 읽기, 한국 레즈비언 운동의 역사와 시네마, 바바라 해머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등이 다뤄질 전망이다. 영화 및 부대행사에 대한 자세한 소개 및 상영스케줄은 서울아트시네마 홈페이지(http://www.cinematheque.seoul.kr/)와 미디어극장 아이공(http://www.igong.org/)의 홈페이지에서 확인 가능하다. |
정인선(자유기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