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동네 작은 언덕처럼 - 5천원으로 만나는 특별한 서울 ⑩ … 옥수동 달맞이공원
이십 년 전 내가 어릴 적 살던 동네는 지금처럼 고층 아파트 단지가 아니었다. 기껏해야 팔 층 남짓의 아파트가 드문드문 서 있었고 입구 어귀에 조그만 상가와 학교가 하나 있는, 그런 아담한 동네였다. 동네 가운데에는 나지막한 언덕이 하나 있었는데 학교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함께 군것질거리를 사들고 언덕에 올라 한 바퀴 돌고 집으로 내려오는 게 하루 일과였다. 하루는 개를 산책시키던 어떤 형이 우리를 골려 주려고 개를 풀어 놨는데, 우리를 향해 달려드는 개를 피해 도망 다니던 그 언덕이 그때는 참 넓어 보였다. 그때 그렇게 높아 보이고 넓어 보이던 그 언덕은 내 키가 커질수록 점점 낮아졌고, 나이가 들수록 더 이상 찾지 않게 되었다. 오래 전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간 뒤 그 동네를 다시 찾았을 때 그때 그 동산은 여전히 그대로인데 속으로 많은 생각이 오고 갔다. 제대로 산책로가 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나무가 울창하지도 않아 겉보기에 볼품 없었지만, 그 동산엔 쉽게 잊혀지지 않는 유년의 기억들이 묻혀 있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생각보다 단단하여 쉽게 쪼개어지지 않았다. 나이가 더 들어 나는 직장인이 되었고, 더 넓고 훌륭한 공원과 언덕을 종종 찾게 되었다. 봄이면 집 근처 올림픽공원을 걸으며 봄꽃 구경을 하고, 가을이면 서울숲 갈대밭에 놀러 가는데 서울에도 이처럼 시민들이 즐겁게 이용할 수 있는 공원이 있음이 내심 반가웠다. 그러나 동시에 어딘가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은, 그 공원들을 즐겁게 거닐 수는 있으나 정을 붙일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공원에서 멋진 시간을 보내는 순간에도 쉬이 가까워지지 않는 거리가 느껴졌다. 사실 잘 다듬어지지 않거나 혹은 규모가 크지 않아도 홀로 생각할 일이 있을 때 집 가까이 두고 쉽게 향할 수 있는 그런 공원은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그런 공간을 꿈꾸었고, 더욱 그런 곳에 마음을 붙이고 싶었다.
성동구 옥수동에 있는 달맞이 공원은 아파트단지 뒤편에 붙어 있는 작은 언덕이다. 3호선 옥수역에서 내려 조금 오래된 아파트 단지로 들어가면 철조망 사이로 작은 쪽문이 나 있는데 이 쪽문이 공원으로 향하는 입구 중 하나다. 공원이라고 이름을 붙였으나 아파트와 그 경계가 모호한 것이, 시작이 참으로 소박하다. 입구를 지나 공원으로 향하는 계단을 하나 둘 오르는데 옆에 개나리가 활짝은 아니나 저마다 송송 피어 있었다. 기상청에서 올해 봄꽃이 열릴 무렵이 요즈음이라고 했는데 제법 쌀쌀한 날씨 탓에 조금 더디게 열리고 있었다. 사실 이 봄꽃 구경을 하고 나면 달맞이공원의 볼거리는 그리 많지 않다. 계단을 오르면 제법 잘 닦여진 흙길이 나오고 그 길을 걷다 보면 주변에 체육시설이 조금 보이다가 바로 한강을 마주하며 공원은 끝이 난다. 사이사이 갈래길이 있어 구불구불 걷는 재미는 있으나 나무가 울창한 것도 아니고 또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것도 아니어서 어딘가 심심한 느낌이 든다. 달맞이공원을 찾은 날도 가볍게 옷을 입은 동네 주민들이 뒷산 산책하듯 한두 명 걷다 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달맞이공원을 찾는 이들이 말하는 이 길의 매력은 그 심심함에 있다. 아파트단지에서 공원에 올라 한강을 마주하며 공원이 끝나는 곳에 정자가 하나 놓여 있는데, 이 정자에 앉으면 한강 전경이 시원하게 한눈에 들어온다. 오른편에 성수대교가 보이고 저 멀리 강남 압구정이 보이는데 그곳의 소란스러움은 이곳까지 닿지 않아 조용히 바람 소리가, 또 강물 흘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신기한 일이었다. 이 강만 지나면 나오는 압구정은 서울에서 가장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데 그를 마주하고 있는 달맞이공원은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는 게 신기했다.
정자에 앉아 쉬었다 가는 걸 딱히 경고판을 세워 막는 것도 아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걷다 흘린 땀을 식히고 가거나, 간식거리를 들고 와서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고 가는 중에도 달맞이공원의 정자는 심심하게, 그러나 말보다 더 강렬한 침묵으로 그 자리에 앉아 있다. 나도 준비해간 도시락을 꺼내 한강을 바라보며 앉아 있다 보니 여러 생각이 떠오른다. 사실 이 달맞이공원은 예전에 한 영화에 배경으로 잠깐 나온 적이 있었는데, 그 영화를 본 뒤로 혼자 생각할 일이 있거나 잠깐 한강 흘러가는 걸 보고 싶을 때는 달맞이공원이 생각났다. 기실 요즘 마음이 어지러운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직장 생활이지만 사회생활이라는 게 이것저것 신경 쓰고 마음 쓰다듬을 일이 많았다. 그래서 오늘같이 생각을 덜어내고 싶을 때는 달맞이공원을 찾은 것이 스스로에게 감사한 일이라는, 그런 생각을 정자에 앉아 오래도록 나누었다.
그렇게 정자에 앉아 도시락을 먹고 있으니 한두 명씩 모르는 사람들이 왔다가 통성명도 없이 서로의 이야기를 간간히 나누다가, 또 말 없이 한강을 내다보다가, 시간이 흘러 서로의 갈 길을 간다. 그래도 이 곳에서 모르는 사람과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또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은 달맞이공원의 쉽게 말하여지지 않는 그 무언가 때문이었다. 강남의 화려한 고층 빌딩도 아닌, 오래된 아파트 단지에 붙어 있는 이 작은 언덕은 낯선 공간을 낯설지 않게 만들었고, 낯선 인연을 어디선가 마주친 듯한 편안함으로 가득 채워주고 있었다. 이곳에는 올림픽공원처럼 널찍한 산책로도 없고, 서울숲처럼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것도 아니며, 상암 하늘공원처럼 연인들이 즐거이 찾는 곳도 아니지만, 어릴 적 누구나 동네 언덕에서 놀고 정을 붙이던 아주 익숙한 온유함이 있다. 그래서 이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어디선가 본 듯한 친근함이 있고, 어딘가를 놀러 간다는 설레는 마음보다 늘 내 곁에 있어서 언제라도 잠시 쉬러 갈 수 있다는 안락함이 있는, 그곳이 바로 옥수동 달맞이공원이었다. 늦은 오후 달맞이공원 흙길을 걸어나오며 아주 오래된 시(詩) 하나가 생각났다. 미당 서정주는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에서 인생을 늘 설렘으로 가득 채우는 것보다 한 걸음 떨어져서 더 여유롭고 온유한 삶을 살자고 말했다. 바로 그처럼 우리의 삶도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침묵과 텅 빈 공간으로 삶의 구석구석을 채워야 함을 달맞이공원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 모두 마치 큰 기대 없이 언제 찾아도 늘 이 자리에 있는 것처럼,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옥수동 달맞이공원을 걷는다.
시민기자 황정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