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근 달 뜨면 공주님의 원혼을 달래드리자 - 新 서울, 전설의 고향 ⑥ … 성동구 행당동 아기씨당
“아바마마! 장군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소녀를 믿고 장군을 처벌하지 마옵소서.” 공주의 목소리는 간절함이 절절했다. 마음이 여린 왕은 장군도 역모에 가담한 혐의가 짙었지만 사랑하는 딸이 간청하자 마음이 흔들렸다. “여봐라! 장군을 풀어주어라!” 왕은 결국 다음 날 공주의 청을 들어주어 장군을 풀어주었다. 아주 오랜 옛날 머나먼 북쪽 나라에서 역모사건이 일어났다. 왕을 모시고 있는 측근들에 의하여 발각된 이 사건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그런데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 중의 하나가 바로 큰 공주가 사랑하는 장군이었다. 아직 아들을 낳지 못해 딸만 다섯인 왕에게 다섯 공주들은 금지옥엽, 그야말로 귀하고 사랑스러운 딸들이었다. 그런데 맏딸인 큰 공주와 은밀한 사랑에 빠져 있던 장군이 바로 역모사건에 연루되자 공주가 그를 구하려고 왕에게 그의 구명을 간청했던 것이다. “공주, 고맙소. 목숨을 구해주었으니 백골난망이요.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소.” 장군은 그날 밤 은밀하게 만난 공주에게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1년 후, 바로 그 장군이 주동이 된 역모로 결국 왕이 쫓겨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왕과 그의 가족들은 겨우 목숨을 건져 측근 신하들과 일부 궁녀들을 거느린 초라한 행색으로 남쪽 나라로 몸을 피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왕과 다섯 공주들은 한양이 가까운 지역에 자리를 잡고 눌러 앉았다.
공주의 깊은 사랑과 왕을 배신한 장군의 역모 “나를 따르던 신하들은 모두 어떻게 되었기에 아무 소식이 없단 말이냐? 이렇게 살다가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왕은 절치부심하며 고국으로 돌아가 왕권을 찾을 날만 학수고대하였지만 세월만 덧없이 흘러갔다. 늙어가는 몸으로 탄식하는 부왕을 볼 때마다 큰 공주의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팠다. 장군을 그때 구명하지 않고 처형해버렸더라면 아버지는 당당한 임금의 자리에 있었을 것이고 이런 신세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공주는 아버지에 대한 죄송스러운 마음과 함께 자신을 배신한 장군에 대한 미움과 원망이 골수에 사무쳤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부왕은 옛 신하들을 수소문하여 찾아보았지만 자신에게 충성스럽던 신하들은 역모세력에게 대부분 죽임을 당하고 없었다. 더구나 일부 신하들은 자신을 배반하고 새 임금 밑에서 벼슬자리에 올라 빌붙어 살고 있었다. 낙담한 부왕은 한숨에 젖어 세월을 보내다 결국 가슴에 맺힌 깊은 한이 병이 되어 다섯 해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큰 공주는 대성통곡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몇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북쪽 나라의 장군은 새로 옹립한 왕의 공주와 혼인하였다는 풍문이 들려왔다. 큰 공주는 깊은 원한이 사무쳐 결국 식음을 전폐한 지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낯선 남쪽 나라에서 의지할 사람을 모두 잃은 네 공주도 삶의 의욕을 잃고 시름시름 앓다가 모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왕과 공주들이 모두 죽자 그들을 돌보았던 시녀들은 인근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런 사실을 알리고 그들의 혼을 달래줄 사당을 세웠다. 그리고 해마다 정월 대보름날이면 정성스럽게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장군에 대한 깊은 원한을 품고 죽은 공주들을 위해 제사지내는 사당
전설의 현장 ‘아기씨당’을 찾은 날은 6월의 때이른 불볕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지하철 2호선 왕십리역에서 내려 9번 출구를 나서 왼쪽으로 왕십리 로터리를 끼고 잠깐 걷자 오른편에 소월아트홀이 나타난다. 소월아트홀은 이 지역 주민들이 즐겨 찾는 구립 문화의 전당이다. 소월아트홀 앞 길가에는 김소월 시인의 흉상과 나란히 소월의 시 ‘왕십리’ 시비가 멋진 모습으로 서있었다. 이곳을 지나쳐 조금 더 걷자 세왕병원이 나타난다. 전설의 현장 ‘아기씨당’은 병원 뒷골목 행당 어린이 공원 뒤쪽 언덕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기씨당은 그러나 평소에는 문이 굳게 잠겨 있어서 안으로 들어가 살펴볼 수는 없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북쪽나라 왕과 공주들의 사당인 아기씨당은 원래 살구당, 혹은 살군당이라 불렸다. 지금의 행당동이라는 이름처럼 이 동네에 있던 큰 살구나무가 당산나무의 기능을 하였으며, 나무 근처에 사당이 있어서 살구당, 또는 살군당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원래 이 사당은 왕십리 기차 정거장 자리에 있었으나, 왕십리~청량리간 기차 정거장이 생기면서 성동우체국 뒤편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 때 그곳에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면서 사당을 옮기라는 압력이 높아 해방되기 두 해 전인 1943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게 되었다. 행당동 아기씨당은 성동구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되어 오늘날에도 매년 정월 대보름이면 제사가 행해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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