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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락원 - 14년만의 국내 개봉!
MOON성元
2011. 7. 28.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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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가 맺는 관계에 진보나 발전이란 없어. 단지 반복만이 있을 뿐이지.” 그 많은 멜로드라마가 사랑이야기를 반복하는 까닭을 <실락원>의 남자 주인공 구키가 설명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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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만에 국내 개봉되는 이 영화는 무성했던 소문 탓인지 매우 익숙하다. 일본대중문화 개방 초기에 수입되었으나 논란 끝에 개봉이 무산되었는데 이번에 국내 최초 정식 개봉된다. 소설과 드라마에 불륜 이야기가 넘쳐나는 이 시대, 꽤 늦게 도착한 이 영화는 불리한 입장일 수 있다. 하지만 선입견이나 부주의로 놓치기에는 아까운 영화다. | |
 1997년 일본 영화 최고의 흥행작인 <실락원>은 제21회 일본아카데미 13개 부분에 노미네이트되어 남, 여주연상과 신인배우상을 수상했다. 어차피 남녀 관계가 반복이라면 시간을 거스를 이야기는 존재하기 마련이고 <실락원>은 그 중 하나다.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강렬하게 접합하여 파국까지 밀어붙이는 지독하게 단자적인 사랑 이야기의 전형이다.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관념의 스펙트럼 한 끝에는 필연적으로 이 전형이 자리 잡고 있을 수밖에 없다. 현실에 구현되는가 여부와 무관하게 이것은 사랑을 표상하는 극단적이며 대표적인 방식이다. 평생 출판 일을 해온 50세 구키는 한직으로 좌천되면서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 된다. 여전히 성실하고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갖고 있지만 그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균열은 문화센터 서예 강사 린코를 만나면서 급속도로 전신을 뒤흔들기 시작한다. 한 번도 정열적인 사랑을 해 본 적 없는 린코는 완벽주의자 의사 남편과 무미건조한 결혼생활을 하며 정신적, 육체적으로 시들어가던 38세에 구키를 만나 걷잡을 수 없는 정념에 휩싸이고 만다. 인생의 내리막에서 열정의 대상을 찾은 남자와 처음으로 사랑의 환희를 느낀 여자가 만났으니 이들의 다음 행보는 짐작한대로 일수밖에 없다. 현실이라면 구질구질한 일상에 녹초가 된 남녀가 정념이고 사랑이고 감정이 퇴색되는 결말을 맞이하겠지만, 사랑의 판타지를 구현하는 멜로드라마로서 <실락원>은 현실을 탈주해버린다. 비상이자 추락을 향해 가는 두 남녀의 일탈이 자극적이거나 난잡하기보다는 낭만적으로 보이는 게 이 영화의 성공 비결이다. 성적인 탐닉의 한계를 알고 있기에 이들의 사랑이 안타깝고 무모한 선택이 수긍된다. 죽음과 맞닿아 있는 낭만적 사랑의 판타지가 아니라면 이 서사 자체가 성립불가능하다. 정념의 파국을 그리고 있지만 인생에 대한 만만치 않은 성찰이 돋보이는 이 영화는 소설 원작답게 문학적인 정취가 가득하다. 육체적 욕망의 밀도만큼 생을 보는 허무함도 깔려 있어 단순한 불륜 드라마 이상의 품격을 갖추었다. 남녀 주인공을 맡은 야쿠쇼 코지와 쿠로키 히토미의 연기는 영화가 빛을 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비현실적이면서 현실적인 캐릭터는 두 사람의 연기를 통해 육화될 수 있었다. 낙원을 찾기 위해 낙원에서 추방되어야 하는 이율배반의 원리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실락원>은 도덕에서도 탈주한다. 사랑이라는 감정에서 몸과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솔직하게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도덕을 옆으로 밀어둘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사랑의 판타지이므로 우려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우리는 이미 낙원에서 추방된 삶을 살고 있는데 이런 픽션이 무엇이 두렵겠는가? |
이현경(영화평론가) | |
[출처 : 웹진 next no.42]